담쟁이가 이름이 된 언덕, 대구 청라언덕

카테고리: 여행 / 봄 태그: #대구 #청라언덕 #근대건축 #도시숲 #POV산책

[사진 자리 — 청라언덕 전경, 가능하면 담쟁이가 보이는 각도]

대구 중구 동산동에 있는 청라언덕은 이름부터가 이미 설명입니다. 푸를 청(靑)에 담쟁이 라(蘿). 언덕 위 붉은 벽돌 주택들을 뒤덮은 담쟁이덩굴을 보고 붙은 이름이에요.

그러니까 이 동네 이름은 건물이 아니라 식물에서 왔다는 거죠. 여행지 소개라면 보통 건축물부터 시작하는 게 순서지만, 여기는 좀 바꿔봐도 될 것 같았어요.


일단 담쟁이부터 보세요

[사진 자리 — 담쟁이가 벽을 타고 오른 클로즈업]

담쟁이덩굴은 계절마다 얼굴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4월엔 연둣빛 새잎이 벽을 얇게 덮고, 한여름이 되면 잎이 겹겹이 쌓여서 벽돌이 거의 안 보여요. 10월 중순부터는 붉게 물들고, 겨울엔 잎이 다 떨어져서 회갈색 줄기만 그물처럼 남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각도로 네 번만 찍어도 전혀 다른 사진 네 장이 나오는 거죠. 청라언덕이 사진 찍기 좋은 이유는 건물이 예뻐서라기보다, 건물을 덮은 게 계절을 타기 때문인 것 같아요.

여담인데, 벽면을 덮은 덩굴 식물은 여름철 벽체 표면 온도를 꽤 많이 낮춰준다고 합니다. 100년 전에 심은 담쟁이가 지금 기준으로도 제법 합리적인 선택이었던 셈이네요.


선교사 주택 세 채

[사진 자리 — 스윗즈 주택 정면]

언덕 위에는 1910년 전후에 지어진 서양식 주택 세 채가 남아 있어요. 스윗즈 주택, 챔니스 주택, 블레어 주택. 각각 그 시절 여기 머물던 선교사들의 이름을 땄습니다.

그런데 눈여겨볼 건 사실 재료 쪽입니다. 붉은 벽돌 아래에 회색 돌이 깔려 있는데, 대구읍성을 헐면서 나온 성돌을 가져다 쓴 걸로 알려져 있어요. 서양식 건물 기초에 조선 시대 성벽 돌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알고 보면 좀 묘하죠.

[사진 자리 — 기단부 성돌이 보이는 디테일 컷]

챔니스 주택은 지금 의료박물관, 스윗즈 주택은 선교박물관으로 쓰고 있어요. 내부 관람이 되니까 시간 여유 있으면 들어가 보셔도 좋습니다.


사과나무 한 그루

[사진 자리 — 사과나무, 봄이면 꽃, 가을이면 열매]

주택 옆에 사과나무가 한 그루 서 있어요. 대구에 처음 들어온 서양 사과나무의 후계목입니다. 대구가 사과로 유명하던 시절이 여기서 시작됐다는 얘기죠.

지금 대구는 사과 주산지가 아닙니다. 재배 북방한계선이 계속 위로 올라가면서 주산지가 경북 북부, 강원도까지 옮겨갔거든요. 이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자리는 그러니까 기후가 지도를 다시 그린 흔적이기도 한 셈이에요.

여행 사진 한 장 찍고 지나가기엔 좀 아까운 나무입니다.


90계단, 3·1만세운동길

[사진 자리 — 계단 위에서 내려다본 앵글, POV로 좋음]

언덕에서 계산성당 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요. 1919년 3월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하러 갈 때 큰길을 피해서 이용했던 솔밭길 자리입니다.

계단 양옆 벽에 당시 사진들이 붙어 있는데, 내려가면서 자연스럽게 읽게 되는 구성이에요. 걸으면서 보게 되니까 사진으로 담기에도 괜찮습니다.

계단이 꽤 가파릅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방향을 추천드려요.


노래 하나가 시작된 곳

청라언덕은 가곡 「동무 생각」의 배경이기도 합니다. 작곡가 박태준이 계성학교 다니던 시절, 이 언덕을 오가며 마주치던 신명학교 학생을 떠올리며 만든 곡이라고 전해져요. 나중에 이은상이 가사를 붙였고요.

언덕에 노래비가 서 있는데, 봄이면 이 노래 때문에 찾아오시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노래 속 계절이 봄이라 4월의 청라언덕은 조금 다르게 읽힙니다.

[사진 자리 — 노래비]


걷는 순서랑 실전 정보

추천 동선 청라언덕 → 선교사 주택 3채 → 은혜의 정원 → 90계단 → 계산성당

소요 시간 언덕만 보면 40분 정도, 박물관까지 다 보면 1시간 30분쯤 걸립니다.

가는 법 대구도시철도 3호선 남산역이나 2호선 반월당역에서 걸어서 10분 내외예요. 언덕이라 마지막 구간이 오르막입니다.

추천 시간대 오전 이른 시간이 제일 좋아요. 붉은 벽돌은 낮의 강한 빛에서 색이 날아가는데, 아침 빛에서는 훨씬 깊게 나옵니다. 흐린 날도 나쁘지 않고요.

계절별로 보면

  • 봄: 담쟁이 새잎, 사과나무 꽃
  • 여름: 벽을 완전히 덮은 짙은 초록. 그늘이 시원해요
  • 가을: 담쟁이 단풍 (10월 중순~11월 초)
  • 겨울: 잎이 떨어져서 벽돌 구조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건축을 보려면 오히려 겨울이 낫죠

다녀오면서 든 생각

[사진 자리 — 마무리용, 봉투나 집게 들고 찍은 컷이 있다면]

이 언덕은 관광지치고 쓰레기가 적은 편이었어요. 다만 계단 아래쪽이랑 벤치 주변엔 음료 컵이 좀 있더라고요. 걸으면서 몇 개 주웠는데 그렇게 무겁진 않았습니다.

풍경 찍으러 다니다 보면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자꾸 눈에 걸려요. 어차피 그 자리에 서 있는 김에 줍는 게 편하더라고요.

청라언덕은 사계절을 다 봐야 제대로 본 게 되는 곳입니다. 다음 계절에 같은 자리에서 다시 찍어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