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골목 산책
붉은 벽돌 성당의 두 탑을 올려다보고, 길 하나 건너 시인이 말년을 보낸 한옥 마당에 들어섰다가, 오래된 뽕나무 이야기가 남은 골목으로 빠져나옵니다. 대구 계산성당 근대골목 산책은 반경 몇백 미터 안에서 백 년 전 대구가 차례로 펼쳐지는 코스예요. 지난 8월, 비가 오락가락하던 날 천천히 한 바퀴 돌아봤습니다.
·
붉은 벽돌 두 탑,
계산성당 ⛪
청라언덕에서 3·1만세운동길, 흔히 ’90계단’이라 부르는 돌계단을 내려오면 길 건너편에 계산성당이 서 있습니다. 1902년,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완공된 벽돌 성당이에요. 당시 대구에서 처음 들어선 서양식 건물이었고, 사람들은 뾰족한 두 탑을 보고 ‘뾰족집’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사실 이 자리에는 1899년 한옥 형태의 십자형 성당이 먼저 지어졌는데, 2년 만에 불에 타 버렸어요. 지금의 벽돌 성당은 그 뒤에 다시 세운 것이고, 1918년에 종탑을 두 배로 높이고 양옆을 넓혀 지금의 모습이 됐습니다. 붉은 벽돌 사이사이 검은 벽돌로 띠를 두른 장식이 가까이서 보면 더 또렷해요. 1981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습니다.
성당 옆으로 난 붉은 벽돌길을 따라 걸으면 창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이어지고, 화단에는 여름 장미가 남아 있었습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길 건너 제일교회의 하얀 첨탑이 보이는데, 붉은 벽돌 성당과 흰 첨탑이 한 프레임에 들어오는 이 구도가 꽤 좋아요.
백 년 넘은 벽돌은
비 오는 날 색이 더 깊어집니다 🧱
흐린 날이라 아쉬웠는데, 젖은 벽돌이 오히려 더 붉게 찍혔어요.
미사 시간에는 내부 관람과 촬영이 제한되니 시간을 피해서 들어가 보세요.
·
마주 선 두 고택,
이상화와 서상돈
성당 옆 골목으로 들어서면 노란 사진 프레임이 먼저 반겨 줍니다. 그 뒤 붉은 벽돌 담장 안쪽이 이상화 고택이에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가 1939년부터 세상을 떠난 1943년까지 말년을 보낸 집입니다.
담장 앞에는 옛 인력거가 한 대 서 있어서 다들 한 번씩 앉아 보고 싶어 합니다. 벽에 붙은 작은 명판들은 고택의 이력을 하나씩 알려 주니 지나치지 말고 읽어 보세요.
마당 안 작은 한옥은 문을 열어 두고 내부를 보여 줍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 「서러운 해조」가 이 집에서 쓰였다고 해요. 붓글씨로 쓴 시 한 편과 사진 몇 장이 전부인 소박한 방인데, 오히려 그래서 오래 들여다보게 됩니다.
이상화 고택 바로 옆이 서상돈 고택입니다. 서상돈은 1907년 나랏빚을 국민이 갚자며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인물이에요. 이 운동의 기록물은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고, 입구에 그 안내판이 함께 서 있습니다.
ㄷ자로 둘러싼 한옥 마당에 들어서면 기와지붕 너머로 제일교회 첨탑이 솟아 있습니다. 한옥 지붕선과 고딕 첨탑, 그 뒤 고층 빌딩까지 겹쳐 보이는 풍경이 근대골목이라는 이름을 한 장으로 설명해 주는 것 같았어요.
고택 바깥벽에는 태극기를 든 사람들을 그린 3·1운동 벽화가 있고, 그 앞에 사진 소품도 놓여 있습니다. 두 고택 모두 관람료는 무료예요.
·
계산예가와 뽕나무골목
고택 바로 옆의 계산예가는 2009년 문을 연 근대문화체험관입니다. 이상화를 비롯해 계산동을 중심으로 활동한 근대 예술인들의 이야기를 전시하고, 관광안내소 역할도 함께 해요. 앞마당 나무 벽에는 근대골목투어 2코스 지도가 그려져 있어서 동선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개화기에 나온 잡지, 해방 직후 대구에서 펴낸 문예지, 교남학원·계성학교 같은 옛 학교 사진이 한쪽 벽을 채우고 있어요. 규모는 작아도 고택을 보고 나서 들르면 앞뒤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계산성당에서 동아쇼핑 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뽕나무골목입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로 왔다가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이 이 일대에 뽕나무를 심고 살았다는 데서 이름이 붙었어요. 지금은 뽕나무 대신 담벼락에 오디가 주렁주렁 열린 벽화가 그 이야기를 대신합니다.
·
알고 가면 편한 것들
- 교통 지하철 2·3호선 청라언덕역에서 3·1만세운동길을 따라 내려오면 바로 계산성당입니다. 청라언덕과 묶어서 걷기 좋아요.
- 주차 계산성당 안 주차장은 좁고 미사 시간에는 신자 우선이라, 여행객은 대중교통이나 주변 유료 주차장을 이용하는 편이 마음 편합니다.
- 관람 시간 이상화·서상돈 고택은 동절기 09:00~17:30, 하절기 09:00~18:00에 열고, 설·추석 당일은 쉽니다. 관람료는 무료예요(현장 안내판 기준).
- 성당 관람 입장은 무료지만 미사 중에는 관광 목적의 내부 관람과 촬영이 제한됩니다. 미사 시간은 성당 홈페이지에서 확인하고 피해서 들어가세요.
- 화장실 한국관광공사 안내 기준으로 계산성당 경내에 남녀 구분 화장실이 있습니다.
- 소요 시간 성당부터 뽕나무골목까지는 천천히 둘러봐도 한 시간 남짓이에요. 청라언덕까지 묶으면 두 시간 정도 잡으면 됩니다.
·
이번 산책길
평가하기
접근성
풍경 만족도
쓰레기 체감량
·
화려한 볼거리를 기대하고 오면 조금 심심할 수도 있어요. 대신 한 블록 안에 성당과 한옥, 시인의 방과 만세운동 벽화가 붙어 있어서, 천천히 걸을수록 이야기가 쌓이는 길입니다. 오래된 집들이 헐리지 않고 이렇게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다음엔 뽕나무골목 너머 약전골목과 진골목까지 이어서 걸어 보려고 합니다 🚶
